한국 고대사에서 부여곤지(扶餘昆支)라는 이름은 그리 익숙하지 않다. 근초고왕이나 개로왕, 무령왕처럼 역사 교과서에서 자주 만나는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백제와 왜의 관계를 살펴보다 보면 곤지라는 이름을 여러 차례 만나게 된다.
잊힌 백제 왕자의 이름
곤지는 백제 왕실의 인물이었다. 그의 정확한 계보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기록이 다르지만,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아우로 전한다. 461년 그는 바다를 건너 왜로 향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곤지가 왜로 향한 정확한 목적을 오늘날 모두 알 수는 없다. 다만 당시 백제와 왜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도왜가 양국 관계와 관련된 중요한 정치·외교적 행보였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461년, 바다를 건너다
곤지의 도왜 과정에는 훗날 백제사의 중요한 인물이 되는 무령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기록에 따르면 개로왕은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곤지와 함께 보내면서, 항해 도중 아이를 낳으면 다시 돌려보내라고 당부했다. 이후 규슈 북서쪽의 섬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이 아이가 훗날 무령왕이 되는 사마였다고 전해진다. 곤지는 이후 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오늘날 오사카 동부의 가와치 지역에는 곤지와 그의 후손에 관한 전승이 남아 있다. 신찬성씨록은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아스카베노 미야쓰코 계통을 곤지와 연결한다. 이러한 기록은 곤지와 그 후손들이 고대 일본의 도래계 씨족 형성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백제로 돌아온 곤지
475년 백제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었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 지금의 공주로 옮겼다. 새로운 수도에서 나라를 수습하는 일이 시급했다. 곤지가 다시 백제 정치의 중심에 등장한다.
삼국사기는 477년 4월 문주왕이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했다고 기록한다. 내신좌평은 왕실과 중앙 정치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관직이었다. 그러나 불과 석 달 뒤인 같은 해 7월 곤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당시 백제에서는 병관좌평 해구를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 이어지고 있었고, 곤지가 죽은 뒤 해구의 권력이 더욱 강해졌다. 결국 문주왕도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다. 이런 정치적 상황 때문에 곤지 역시 권력 투쟁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황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며, 사료가 그의 피살을 직접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곤지 이후의 백제
곤지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흔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계보에서는 이후 백제 왕이 나온다.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비교적 분명하며, 무령왕 역시 일본 측 백제계 기록에서는 곤지의 아들로 전해진다. 다만 무령왕의 정확한 혈통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곤지와 그의 후손들이 한성 함락 이후 백제 왕실의 재편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백제는 한성을 잃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웅진에서 나라를 정비했고, 특히 무령왕대에 이르러 왕권을 안정시키며 다시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에 남은 곤지의 흔적
곤지의 흔적은 일본에도 남았다.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아스카에는 아스카베 신사가 있다. 이 지역은 곤지를 시조로 전하는 아스카베노 미야쓰코 일족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신찬성씨록 역시 이 씨족과 백제 왕족 곤지의 관계를 전한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과 관련된 신사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현재 하비키노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지금의 제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이며, 곤지왕을 제사했다는 설이 전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곤지가 1,500년 동안 한결같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신으로 모셔졌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곤지와 그의 후손에 관한 제사와 전승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바다를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역사
곤지의 삶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어느 한쪽에만 속한 인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가 활동했던 5세기의 바다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국경과는 다른 공간이었다. 사람과 기술, 문화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바다를 건너 끊임없이 오갔다. 곤지 역시 그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백제와 왜를 오간 왕족이었다.
오늘날 곤지를 매개로 한 교류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 송파구와 충남 공주, 일본 하비키노와 가라쓰 등 곤지와 백제의 역사에 관련된 지역들이 그의 흔적을 새로운 교류의 소재로 삼고 있다.
곤지를 다시 바라보다
그렇다면 백제 왕자 곤지는 누구였을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과 아직 알 수 없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백제 왕실의 인물이었고 5세기 후반 왜로 건너갔다. 이후 백제로 돌아와 내신좌평에 올랐으며 47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손은 백제 왕실과 일본의 도래계 씨족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
반면 그가 왜에서 정확히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사회적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많은 부분이 역사적 추론의 영역에 남아 있다. 바로 그 빈자리가 곤지를 흥미로운 인물로 만든다.
1,500여 년 전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건넜던 한 백제 왕자.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전기만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가 끊임없이 오갔던 고대 동아시아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곤지는 그렇게, 아직 더 밝혀야 할 이야기를 남긴 채 오늘 우리 앞에 다시 서 있다. © 산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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